디자인 시스템이 모든 것을 해결하리라 믿었던 시기
몇 년 전, 스타트업 디자인 조직의 핵심 키워드는 단연 “디자인 시스템”이었습니다.
Figma와 같은 웹 기반의 UI 프로토타이핑 툴이 발전하면서 디자이너의 생산성은 엄청나게 올라갔습니다.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회사는 앞다투어 그들만의 디자인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컴포넌트 기반 설계, 디자인 토큰, 문서화된 규칙…
디자인은 점점 더 ‘관리 가능한 자산’이 되어 갔고, 조직은 그것을 운영의 효율성으로 포장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런 시스템을 잘 구축하고도 브랜드가 전혀 각인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심지어 제품은 잘 만들어졌지만, 아무도 그 브랜드가 ‘왜 이 형태여야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늘고 있죠.
디자인 시스템이 강력해질수록, 브랜드의 감도는 아이러니하게도 더 흐려졌습니다.
브랜드를 감각하는 능력은 시스템화할 수 없다
스타트업은 기본적으로 경쟁이 빠른 시장에 있습니다.
같은 기능, 같은 인터페이스, 같은 가격대의 서비스가 여럿 있을 때 사용자는 “느낌”으로 브랜드를 구분하게 됩니다. 요즘과 같이 ‘사용자 경험’이 다분히 논리적인 영역처럼 자리잡고 있는 시대에, ‘느낌’ 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추상적이고 무책임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놀랍게도 사용자가 얻게되는 경험은 감성의 영역이 굉장히 크게 작용합니다.
그렇다면, 그 느낌이란 것은 어디에서 올까요?
로고나 메인 컬러, 레이아웃 같은 시각적 요소만은 아닙니다.
버튼 하나의 둥글기, 사용자 피드백 알림의 어조, 첫 진입 시 보이는 이미지와 카피의 톤.이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브랜드의 얼굴이 됩니다.
이런 유기적인 브랜딩의 중요성은 비단 인터페이스 디자인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서비스의 영역에 공통적으로 적용됩니다. 특히나 작은 규모의 브랜드일 수록 성장 여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작은 브랜드일 수록 감도와 무드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성공 여부가 확연히 달라진다.
당연히 이런 내용들은 토큰으로 관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사람, 즉 브랜드의 중심 톤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조율할 수 있는 디자이너가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감도를 다룰 수 있는 디자이너의 부활
그래서 요즘 다시 주목받는 역할이 바로 비주얼 아이덴티티와 사용자 감각 사이를 연결해주는 디자이너입니다.
UI 컴포넌트를 만들기보다, 브랜드의 정체성과 무드를 설계하는 디자이너죠.
이 디자이너들은 종종 이렇게 일합니다:
- 무드보드나 키비주얼로 브랜드의 시각 언어를 시도하고
- 에디토리얼한 이미지나 마이크로카피에서 일관된 캐릭터를 부여하며
- 제품이 아닌 브랜드 자체의 느낌을 사용자에게 감정적으로 전달합니다
특히 요즘 스타트업은 초기부터 콘텐츠 마케팅, SNS, 뉴스레터 등 다양한 채널을 병행하기 때문에 모든 접점에서 ‘일관된 브랜드’가 유지될 수 있도록 지휘할 디자이너가 꼭 필요합니다.
브랜드는 결국 무드다
사실 브랜드란 거창한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 서비스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분위기’, 그것이 바로 브랜드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그 무드를 설계하는 건 로고 디자이너도, 개발자도 아닙니다.
감각과 구조를 함께 다룰 줄 아는 디자이너, 즉 브랜드를 이야기처럼 풀고, 구조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런 역할을 맡는 브랜드 디자이너는, 이제 단순한 ‘비주얼 담당자’가 아니라
조직의 전략과 감도를 연결하는 연결자이자, 디자인 시스템 안에 정체성을 흘려보내는 설계자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