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직관인가 논리인가?

여전히 현업에서 일하고 있는 저는 요즘 이런 질문을 자주 던집니다.
“지금의 디자이너는 여전히 ‘디자인’을 하고 있는 걸까?”
불과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디자이너는 분명 아티스트의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조형 감각, 색채 감각, 형태미를 다루는 미학적 감수성이 직업적 핵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디자이너는 점점 기획자와 전략가의 자리에 서고 있습니다.

장인과 아티스트, 그리고 디자이너로

고대의 건축가, 장인, 화가들은 사실상 디자이너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작업은 이름 그대로 예술·공예의 일부였고, ‘디자이너’라는 전문 직업은 아니었습니다.

체코의 유명 화가 ‘알퐁스 무하’의 Rodo 향수 포스터 <1896>

앞서 언급했듯이, 상황이 달라진 건 산업혁명 이후 입니다. 대량생산의 시대가 열리자 단순히 기능만 있는 물건보다, 기능과 미학을 효과적으로 융합시킨 제품들이 폭발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고객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한 제품들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제품들은 사라져 갔습니다. 이때 비로소 디자인이 독립된 직업으로 분화되기 시작합니다.

19세기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는 기계적 생산에도 예술적 가치를 불어넣어야 한다며 미술공예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디자인의 예술적 뿌리를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우하우스 이후, 디자인은 문제 해결로

20세기 초 독일의 바우하우스(Bauhaus)는 디자인을 교육과 철학의 영역으로 끌어올렸습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라는 원칙이 이때 태동했죠.
이 시기 이후 디자이너는 장식가를 넘어, 문제를 진단하고 이를 해결하는 전문가로 정의됩니다.

현대의 UX 디자이너: 경험을 설계하다

디지털 시대가 열리면서 디자이너의 무대는 물질에서 비물질로 확장됐습니다. 앱, 웹, 소프트웨어는 눈에 보이는 형태보다 사용자들의 경험이 핵심이 되었습니다. 1990년 초 ‘도널드 노먼(Donald Norman)이 애플에 일할 당시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고 전해지죠. 특히나 2007년 애플이 아이폰을 출시하면서 UX 디자이너(User Experience Designer)라는 새로운 직군이 산업에 키맨처럼 등장하였습니다.
UX 디자이너는 단순히 화면을 꾸미는 사람이 아니라, 사용자가 버튼을 누르고, 전환을 거치고, 로딩을 경험하는 순간까지의 모두를 설계하는 전문가로 자리매김 하였습니다.

프로덕트 디자이너: 전략의 최전선

더 나아가 최근 각광받는 역할은 프로덕트 디자이너(Product Designer)입니다. 이들은 UX뿐 아니라 비즈니스 목표, 시장 전략, 기술적 제약까지 고려하며 제품의 전체 방향을 잡습니다.
즉, UX 디자이너가 “사용자의 경험”에 초점을 둔다면, 프로덕트 디자이너는 “사용자 + 비즈니스 + 기술”을 아우르는 전략가라고 할 수 있죠.

직관이 밀려나는 풍경

하지만 저는 조금 우려가 됩니다. 오늘날 디자인 업계는 논리와 데이터, 효율과 근거를 무엇보다 중시합니다. 물론 이는 필수적이고 긍정적인 변화입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직관(intuition)’이라는 디자이너의 본질적인 무기가 종종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혁신적인 디자인은 종종 설명할 수 없는 직관에서 비롯됐습니다. 직관은 근거 없는 추측이 아니라, 경험과 감각이 쌓여 만들어낸 ‘압축된 지혜’에 가깝습니다. 이 영역이 과소평가된다면 디자인은 단지 논리의 프레임워크에 갇혀,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과정과 결론에 부딛힐 수 있습니다.

소니와 넷플릭스 같은 대기업도 진단하지 못했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성공. 과연 첨예한 분석만이 성공적인 서비스를 만드는 것일까?

미학과 데이터 사이에서 디자이너의 역할

과거의 디자이너가 미학을 기반으로 발전하였다면, 오늘날의 디자이너는 기획자이자 전략가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대적 요구에 따른 필연적인 변화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데이터는 과거보다 훨씬 더 방대하고 복잡하며, 이를 기반으로 도출된 결과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할 만한 근거처럼 받아들여집니다.

다만 비주얼 경험 디자이너인 저는, 이 과정에서 디자인이 본래 지니고 있던 직관적이고 비선형적인 힘이 소홀히 다뤄지는 풍토가 다소 우려스럽기도 합니다.

앞으로 AI가 더욱 발전한다면 데이터 분석과 전략 수립은 지금처럼 큰 비용과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UX 연구에서 방대한 사용자 데이터를 자동으로 분석하거나, A/B 테스트 결과를 실시간으로 최적화하는 일도 AI가 대신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디자이너는 어떤 영역에서 차별성을 가질 수 있을까요? 저는 바로 데이터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적 경험의 층위라고 생각합니다. AI가 패턴과 확률을 기반으로 최적화를 해낸다면, 디자이너는 여전히 맥락을 읽고, 예상치 못한 사용자의 욕망을 포착하며, 직관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또한 마지막 프로덕트의 퀄리티까지 챙겨 볼 수 있는 사람이어야 겠지요.

앞으로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예술과 기획, 직관과 논리, 그리고 인간과 AI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짜 의미 있는 진화를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Add a comment Add a comment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Previous Post

디자이너는 정체성이다.

Next Post

와우 포인트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