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통하지 않는 공식들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대학교육, 사회적 훈련, 그리고 과거 세대의 성공공식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요.
“좋은 대학에 가면 안정적인 직장을 얻고, 그 직장이 너의 인생을 책임질거야.”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 말은 절반쯤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땐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남아 있었고, 기업은 인재를 ‘관리’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대학 졸업장은 더 이상 경쟁력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학 진학률은 OECD 평균을 훌쩍 넘어서며(2024년 기준 약 73%),
학력은 차별화의 증표가 아니라 젊은이들의 사회 진출을 유예하는 또 하나의 허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게다가 요즘 세대 대부분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제2외국어까지 다룹니다.
그럼에도 그 언어 능력을 실제로 ‘업무에 활용할 기회’를 얻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조직은 여전히 경험 중심의 평가 구조를 유지하고 있고, 신입의 가능성보다 ‘즉시 투입 가능한 사람’을 선호하죠.
즉, ‘좋은 학력이 좋은 직장과 안정된 삶을 가져다 준다’의 선형 공식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입니다.
조직은 자아의 무대가 아니다
조직이라는 시스템은 태생적으로 ‘평가의 구조’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성과는 언제나 타인의 기준으로 판정되고, 전문성은 타인의 승인 아래에서만 발휘됩니다.
이 구조 안에서 자아실현을 꿈꾸는 건, 결국 타인의 통제 아래에서 자신을 증명하려는 일입니다.
이건 디자이너, 마케터, 기획자처럼 창의성을 무기로 삼는 직군일수록 더 고통스럽습니다.
정체성이 강한 디자이너는 조직의 협업 구조 속에서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게 내가 원한 결과물이 아닌데도’ 팀의 합의로 결정되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자아실현을 회사 안에서 찾으려는 사람은 쉽게 번아웃되기도 합니다.
노동의 본질은 ‘기여(contribution)’인데, 자아실현은 ‘표현(expression)’을 요구하거든요.
둘은 닮았지만, 완전히 결이 다릅니다.
AI시대, 전통적 노동 구조의 붕괴
AI는 단순히 사람의 어떠한 일을 대체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AI가 가져오는 진짜 변화는 노동 구조의 재정의입니다.
반복적 업무는 이미 알고리즘이 처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비창의적이라 여겨지던 영역조차(데이터 분석, 번역, 리서치와 같은)
이제는 AI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합니다.
그렇다면 남는 건 무엇일까요?
경험과 맥락을 바탕으로한 판단력. 즉, ‘경험 기반의 사고력’입니다.
결국 기업은 ‘신입’을 길러낼 필요가 점점 줄어듭니다.
AI가 일정 수준의 효율을 보장하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경험이 검증된 시니어 중심 구조가 합리적입니다.
이런 시대에,
좁아지는 ‘조직의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위해
수년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는 게 과연 좋은 전략일까요?
‘좋은 직장’이 사라진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그 문을 두드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자아실현의 무대를 재배치하라
직장에서 자아실현을 시도하는 건, 이제는 비효율적인 선택입니다.
회사는 ‘역할을 수행하는 공간’이지, 자아를 증명하는 무대가 아닙니다.
그곳에서는 기능(function)이 중요하지, 정체성(identity)은 부차적입니다.
진짜 자아의 성장은 회사 밖에서 일어납니다.
시장의 논리로 평가되지 않는 경험들,
예를들면 사이드 프로젝트, 블로그 글쓰기, 나만의 컨텐츠 영상 만들기, 협업, 커뮤니티 활동 등. 이 모든 것이 ‘나를 확장하는 자산’이 됩니다.
일이 내 인생을 대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때,
오히려 일은 훨씬 가벼워지고 창의적으로 변합니다.
자아를 덜어낸 몰입은 냉소가 아니라 오히려 성숙입니다.
인생의 두 번째 챕터
최근의 ‘조용한 퇴사’ 트렌드는 어른들이 이야기하듯이 그저 덜 배고파서 일까요?
저는 오히려 이런 현상이, 최근 세대의 게으름이 아니라 현실적인 재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구조가 이미 바뀌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과 자아 사이의 거리를 다시 세워보려는 시도죠.
과거 세대는 회사가 인생을 책임지던 시절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대는 그 책임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습니다.
조직에서의 수명은 짧아지고, 정년보장이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사라졌습니다.
얼마전 비교적 안정적인 제조 기반의 대기업 LG에서도 55세 이하 희망퇴직을 모집했죠.
네 이게 현실입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60세 이전에 퇴직하는게 대부분이지만, 우리 인생의 길이는 100세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당연히 ‘은퇴 이후의 삶’을 전제로 커리어를 설계해야 하는 세대입니다.
회사가 끝이 아니라, 과정의 일부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연습생이다
아이돌 연습생이 당연히 데뷔만 하면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어린 친구들도 나비가 될 날을 고대하며,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하고 인내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른인 우리 직장인들도 조직을 ‘숙련의 공간’으로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그 안에서 얻는 것은 완성된 자아가 아니라,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근육과 내구성입니다.
저는 예술학도로 졸업하여 1n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퇴근후에 매일 그림을 그려 다수 전시에 작가로서 작품을 판매해 보기도하고,
믿을만한 동료들과 게임을 제작하여 인디게임상도 수상해 보았으며,
와이프와 함께 와디즈 펀딩을 7000% 초과 달성하여 브랜드를 런칭하기도 했습니다.
올해에는 해당 브랜드에서 발표한 제품이 굿디자인 어워드에 선정되기도 했죠.
저는 이러한 자기만의 프로젝트, 관계, 실패, 창작의 고통,
과 같은 요소들이 모여야 비로소 ‘경험’이 싹 틔운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을 또 조직에서 활용하고 있죠.
비상을 꿈꾸는 많은 직장인들이여,
더이상 조직에서 자아실현을 꿈꾸며 괴로워 하지 말고, 그곳을 연습실로 삼으세요.
그렇게 다져진 사람만이 이후의 시대에서도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