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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만 잘하는 사람은 언제부터 표준이 됐을까

한 사람을 한 직업으로 부르는 습관은 200년 남짓 된 공장의 잣대입니다. AI가 직무 단위로 들어오는 지금, 개인은 기획부터 운영까지 흐름 전체를 보는 제너럴리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카메라·키보드·컬러칩·와이어프레임·시제품·마이크가 한 책상 위에 격자로 정렬된 한 사람의 작업 도구

하나만 뾰족하면 될까

요즘 자주 붙잡고 있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만 뾰족하게 잘하는 사람이, 앞으로도 계속 필요할까.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이상하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떠오릅니다. 그의 노트에는 비행 장치의 날개 설계와 사람 팔의 근육 스케치가 같은 손으로 남아 있어요. 그림을 그리고, 건물과 운하를 설계하고, 기계를 고안하고, 해부를 해서 혈관을 기록한 사람.

지금 이런 이력서를 받으면 다들 고개를 갸웃할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은 화가인가, 엔지니어인가, 해부학자인가. 우리는 한 사람을 한 직업으로 부르는 데 너무 익숙하니까요.

그런데 그 익숙함은 생각보다 오래된 게 아닙니다.


한 가지만 하는 사람이 표준이 된 날

사람은 아주 오래전부터 직업을 가졌습니다. 대장장이도 있었고 서기도 있었죠. 달라진 건 일을 얼마나 잘게 쪼개느냐였어요.

애덤 스미스는 1776년 『국부론』에서 핀 공장 이야기를 합니다. 핀 하나 만드는 일을 철사를 펴는 사람, 자르는 사람, 끝을 가는 사람 식으로 열여덟 단계로 나눴더니 생산량이 수백 배로 뛰었다는 이야기예요. 산업혁명은 이 방식을 공장 전체로 넓혔고, 사람은 공정 하나를 맡는 단위가 됐습니다.

한 줄로 늘어선 작업대에서 각자 한 공정만 맡은 분업 조립 라인

교육도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대학은 학과로 나뉘었고, 우리는 그 안에서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도록 배웠죠. 디자인과를 나오면 디자이너, 컴퓨터공학과를 나오면 개발자.

그렇게 보면 다빈치가 이상해 보이는 이유는 다빈치보다 우리 쪽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쓰는 잣대가 200년 남짓 된 ‘공장의 잣대’라서요.


AI가 들어오는 자리

그 잣대가 요즘 흔들리고 있다고 느낍니다.

얼마 전 GPT-6 Astra가 공개된 뒤, 한 일본 디자이너가 남긴 글이 많이 공유됐어요. AI가 피그마를 직접 조작해서 브랜드 아이덴티티부터 페이지 디자인까지 만드는 걸 보고, 디자인 품질로는 AI에게 질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전부 뒤집혔다고 적었죠.

저는 그 글에서 AI가 들어오는 ‘단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브랜드 디자인, 페이지 디자인, 영상 편집, 게임 월드 제작. 우리가 사람에게 나눠 맡겨 온 칸 하나하나가 그대로 자동화의 칸이 되고 있거든요.

그러니 디자이너만, 개발자만으로는 점점 버티기 어려워질 겁니다. 한 칸만 가진 사람은 그 칸이 채워지는 순간 설 자리가 좁아지니까요.


남는 건 흐름을 보는 눈

그럼 무엇이 남을까요.

제가 내린 답은 기획, 제작, 홍보, 운영으로 이어지는 흐름 전체를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영어로는 제너럴리스트라는 말이 가장 가까운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이해는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각 단계가 다음 단계에 무엇을 넘겨야 하는지 아는 통찰, 실제로 끝까지 가 봐서 어디서 막히는지 몸으로 아는 경험, 여러 결과 중 무엇이 좋은지 고를 수 있는 취향.

제너럴리스트의 세 가지 — 통찰(흐름을 읽는다), 경험(몸으로 안다), 취향(AI가 가장 늦게 가져간다)

셋 중에서 AI가 가장 늦게 가져갈 건 취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과물은 얼마든지 여러 개 나오지만, 그중 무엇을 세상에 내보낼지는 여전히 사람이 고르고 있으니까요.


깊이를 재는 단위

여기서 오해가 생기기 쉽습니다. 제너럴리스트가 되라는 말이 모든 걸 얕게 하라는 말처럼 들리거든요.

깊이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다만 깊이를 재는 단위가 바뀐다고 느낍니다. ‘디자인을 얼마나 깊게 아는가’에서 ‘이 프로덕트를 얼마나 깊게 아는가’로요.

디자인을 아무리 깊게 알아도 그게 어떻게 구현되고 어떻게 알려지는지 모르면,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는 마지막 걸음에서 멈추게 됩니다. 하나의 프로덕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 본 사람은 각 단계가 서로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요. 저는 그 앎이 지금 시대의 깊이라고 봅니다.


기획이라는 말

그래서 요즘 기획이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 그 기획을 아직도 프로젝트 맨 앞에서 문서를 쓰는 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말하는 기획은 그보다 훨씬 넓습니다. 이 화면을 어떤 방향으로 디자인할지, 그 디자인을 어떤 제약 안에서 구현할지, 완성된 걸 누구에게 어떻게 알릴지, 내보낸 뒤 어떻게 운영하고 고칠지. 이 모든 걸 한 장의 계획 위에 올려놓는 일이죠.

게임 UI를 설계할 때도 그렇습니다. 좋은 시안은 구현 비용과 출시 일정 안에서만 살아남아요. 시안만 보고 판단하면 예쁘지만 만들 수 없는 화면이 나옵니다. (그런 화면을 저도 꽤 여러 번 만들어 봤습니다…)

AI가 각 단계의 손을 빌려주는 지금, 그 한 장을 그릴 수 있는 개인의 가치는 오히려 올라간다고 느낍니다.


조직은 여전히 전문가를 뽑는데

물론 채용 공고는 지금도 디자이너와 개발자를 따로 찾습니다.

그건 조직이 흐름 전체를 쥐고, 필요한 칸을 사람에게 나눠 맡기기 때문이에요. 전체를 보는 일은 조직이 하고, 개인은 역할 하나를 맡는 구조. 조직 안에서는 여전히 효율적인 방식입니다.

그런데 개인에게는 그 조직이 없습니다. 그리고 AI가 칸을 하나씩 채워 주면서, 혼자서도 무언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 수 있는 때가 왔어요. 그 기회를 쓰려면 조직이 해 주던 일, 전체를 보는 일을 개인이 직접 해야 합니다.

밤늦게 혼자 UI 디자인과 영상 편집 화면을 띄워 놓고 일하는 사람, 뒤 화이트보드에 네 갈래 계획

그렇다고 전부 잘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각 단계를 직접 한 번은 끝까지 해 보는 것.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디서 무엇이 막히는지 알고 나면, 그 단계를 맡길 사람이나 AI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가 보이거든요.


다빈치에게 직업을 묻는다면

다빈치에게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면, 아마 대답이 조금 어색했을 겁니다. 그는 직업보다 알고 싶은 것과 만들고 싶은 것을 따라 움직인 사람이었으니까요.

AI 시대에 우리가 받게 될 질문도 비슷하게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디자이너인가요, 개발자인가요. 그보다는, 당신은 무엇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 낼 수 있나요.

그 질문에 선뜻 답할 수 있다면, 이미 제너럴리스트의 길 위에 서 있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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